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여호수아의 이야기를 한 편씩 살펴봅니다.
Do not be terrified; do not be discouraged — 여호수아 1:9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가나안은 풍요하고 기름진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차지하는 것은 우리의 남북통일보다 더 비현실적이었습니다.
애굽의 종살이를 청산하고 모세를 따라나섰지만 이스라엘은 여전히 힘이 없고 약했습니다. 무기도 없고 싸워 이길만한 아무 근거도 없었습니다. 이제 모세도 죽고 없으니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수 1:6, 9)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만 하면 약속의 땅을 차지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게 하고 심지어 원망하며 떠나게 하는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승리하려면 누구보다도 우리 자신과의 싸움에서 먼저 이겨야 합니다. 이 승리를 위한 하나님의 요구는 무엇입니까?
모세는 지팡이로 애굽의 강물을 피로 만들고, 개구리와 파리 등 애굽의 신들을 보기 좋게 엎드리게 했습니다. 바로는 항복했고 이스라엘은 홍해를 갈라 육지같이 건너게 했습니다. 이제 모세는 가고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인도해야 합니다. 홍해를 갈라 바로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무사히 탈출시킨 모세처럼 행할 수 있을지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니 두려워 말라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생전에 정탐꾼을 보내 알아보았던 그 땅은 심히 기름지고 좋은 곳이었습니다. 포도송이를 장대에 메고 와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 땅에는 거인들이 살고 있었고 어느 모로 보나 이스라엘이 상대할 수 없었습니다(민 13:27, 28). 이스라엘은 불평하며 원망하고 애굽으로 돌아가는 게 낫겠다 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만 그 땅을 차지하자고 했습니다(민 14:9).
이제 그 땅 앞에 선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기게 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약속은 믿을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한 번 계획하신 일을 변경하시지 않습니다. 반드시 이루십니다.
여호수아 1:5, 6절입니다.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 믿음으로 담대하게 가나안 정복 전쟁에 나선 여호수아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가 기록된 성경의 약속을 믿고 행하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모든 복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겁낼 것이 없지만 불순종하면 결코 소망이 없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보기에 이스라엘이 비록 메뚜기같이 보일지라도 하나님께 순종하면 이깁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 1:7, 8절에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성도는 두려울 게 없습니다. 국가 간의 전쟁이나 개인적으로 생존경쟁의 전쟁을 치르는 일이나 원리는 한가지입니다. 전쟁의 승패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역대하 20:15절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합니다. 시편 24:8절에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고 합니다. 시편 27:3절은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이스라엘에게 주시겠다는 축복의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네게 주리라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사 네 몸의 소생과 가축의 새끼와 토지의 소산을 많게 하시며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신 28:11-14)
이스라엘의 많은 무리가 가나안 정복이 불가능하다고 했을 때에 여호수아는 갈렙과 함께 “그 땅을 차지하자!” 했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우리들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우리의 여호수아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사셨습니다.
우리를 얽어매던 모든 죄악의 짐은 사라지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8-20) 하신 예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갈릴리 가족 여러분! 축복을 받아 누리기가 어렵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대신 싸워주십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나 약속의 땅으로 전진할 때에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목이 마르면 반석에서 물을 내주시고 배가 고프면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내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싸우고 서로 사랑하기 위해 싸웁니다. 우리의 가나안은 먼 데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가장 가까운 데서 출발해서 땅 끝까지 예수님의 사랑이 전해지면 마침내 하늘 가나안에 도착할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며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가나안 정복에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The God of Moses and the God of Joshua — 여호수아 1:1-14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은 이렇게 비유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인에게 좋은 땅을 받아 살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는 먼 나라에서 학대당하며 괴로운 세월을 보내고 있었지만 포악한 주인이 놓아주지를 않았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르고 자신을 구해 줄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를 따라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살아야 할 그 땅에는 이미 거주자들이 있었습니다. 남의 땅에서 주인행세를 하며 살던 그들은 강하고, 주인의 땅을 약속받은 사람은 연약하여 그 땅을 차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 땅을 차지했습니다. 어떻게 했을까요? 비유에서 땅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좋은 땅을 약속받은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바로의 종으로 살았지만 모세가 종살이에서 해방시켜주었고, 약속의 땅 앞까지 인도했습니다.
이제 모세는 죽고 여호수아가 대장되어 그 땅을 차지해야 합니다. 모세와 함께 하셨던 하나님이 여호수아와 함께 하심으로 이스라엘은 마침내 약속의 땅에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모세의 하나님, 여호수아의 하나님을 섬김으로 천국 시민의 복을 받기로 합니다.
애굽에서 학대당하는 이스라엘을 구하라고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당시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던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치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모세는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출 3:11)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출 4:1)하며 여러 말로 하나님께 항변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지팡이를 뱀이 되게 하시는 등 기적을 베푸시고 말솜씨가 부족한 모세를 위해 형 아론을 붙여주셨습니다. 모세는 양치던 지팡이를 손에 들고 애굽으로 갔고, 애굽 왕 앞에서 열 번이나 기적을 행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온 세상을 다스리심을 증거했습니다. 완악한 바로는 마침내 모세에게 항복했고 모세의 하나님께 굴복하여 이스라엘을 놓아주었습니다.
모세라 하면 흔히 애굽의 열 가지 재앙과 홍해의 기적을 생각합니다. 지팡이로 마술을 부리듯이 단숨에 바로를 굴복시킨 줄로 착각합니다.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수많은 기적을 행했지만 인간 모세가 행한 일이 아닙니다. 모세를 이스라엘의 해방자로 세상에 보내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함을 위해 구별된 레위 족속으로 태어나게 하셨고 바로의 살해계획에 오히려 애굽의 왕자로 성장하게 하셨습니다. 당시에는 양치기에 불과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받고 모세는 애굽으로 갔고 이스라엘은 애굽을 떠났습니다. 가나안을 이스라엘에게 주시기로 한 하나님의 계획은 변경될 수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도 예수님의 피를 믿는 믿음을 주셔서 죄악 세상을 떠나게 하셨고, 영적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여호수아는 젊은 시절부터 출애굽을 주도한 모세를 가까이 모셨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일하실 때에 모든 이스라엘 중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 현장을 목격했습니다. 모세가 보낸 정탐꾼들이 가나안 땅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그 땅을 정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했습니다. 그 때에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하며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고 여호수아와 갈렙만 그 땅은 ‘우리 것’(민 14:9)이라 했습니다.
이제 그 가나안 앞에 선 여호수아는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수 1:9)는 하나님의 음성에 힘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전진했습니다. 모세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너게 했듯이,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이 넘치는 요단 강물을 마른 땅으로 걷게(수 3:14-17) 했습니다. 기브온 전투에서는 태양을 멈추게(수 10:12-14) 했습니다. 모든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마침내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을 정착시켰습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믿음으로 감당하고자 하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같은 하나님이지만 모세는 하나님과 직접 대면했고 여호수아는 모세를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았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 십계명을 받을 때도 백성들은 산 아래서 기다렸고 여호수아는 모세를 따라 산에 올라갔습니다. 모세는 여호수아를 수종자(隨從者)로 삼아 가까이 있게 했고, 출애굽 이후 최초의 전쟁인 아말렉과의 전투에도 여호수아를 지휘관으로 보냈습니다.
같은 달이 지구와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할 때에 슈퍼문으로 떠오르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거리가 중요합니다. 여호수아는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여부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했던 사도들의 발자취를 따릅니다. 그러나 사도 시대에도 거짓 선지자와 거짓 교사들로 교회는 혼란스러웠습니다. 세상과 사람이 아니라 모세와 여호수아처럼 하나님이 함께하실 때만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정착하게 될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곳입니다. 이제 우리는 여호수아를 통해 그 약속이 실현되는 과정을 볼 것입니다. 우리의 가나안은 불신앙의 세상을 변화시켜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는 곳에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 목표를 세우고 전진하는 동안은 항상 하나님이 함께하십니다.
모세를 통해서 일하시고 여호수아를 통해서 일하신 것처럼 지금 우리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셔서 이스라엘을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셨고, 여호수아를 통해 자유를 얻은 이스라엘이 축복의 땅 가나안에 살게 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모세처럼 죄의 종으로 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처럼 구원받은 성도들이 영적 가나안인 교회 생활을 잘 해낼 수 있도록 마귀와의 모든 전투에 승리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정복했고 그 땅에 정착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마귀와의 전쟁은 계속되었습니다. 미정복 지역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리고 우상숭배와 타락한 문화가 지배하던 가나안의 삶에 동화될 위험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면 복을 받지만 불순종하면 고난의 가시밭길을 걷는 줄을 알면서도 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이와 같은 가나안의 삶은 오늘 우리들의 교회 생활과 비교됩니다. 사탄의 음모는 계속되고 우리는 약하지만 승리는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 근거입니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 1:7, 8)
사랑하는 갈릴리 가족 여러분! 하늘의 달과 별들을 보면서 우리는 그것들을 지으신 하나님을 경외하게 됩니다. 대자연의 웅장함 앞에서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다윗은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시 95:6)고 했습니다.
또한 하늘이 캄캄하고 땅이 흔들리며 온갖 재앙과 무자비한 전쟁의 참상이 거침없이 드러나면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을 기억하며 두려움에 떱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아는 것만큼 잘 살 수 있고, 뛰어난 지혜가 살기 좋은 세상을 가능하게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감당하기에 이런 것들은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세속적인 지혜와 지식으로 생명을 구하라고 합니다. 우리의 선함과 능력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이 유혹에 마음이 동요되지 않고 하나님께만 집중할 수 있도록 모세와 여호수아의 사역을 공부했습니다. 전쟁과 대재앙의 공포와 두려움이 마음을 짓누르고, 어두움의 세력들이 타락한 인간 본성을 여지없이 드러낼지라도 모세의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 되시고 여호수아의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 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실감하지 못할지라도 저 높은 곳에 계시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와 계십니다. 모세처럼, 여호수아처럼 하나님이 주신 일들에 좋은 열매를 풍성하게 거두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The two spies and Rahab the prostitute — 여호수아 2:1-16
이스라엘이 마침내 가나안 땅에 이르렀습니다. 여호수아는 백성들을 인도하여 그 땅을 정복할 임무를 맡았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는 격려의 말씀이 있었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정복전쟁을 위한 행동을 개시해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우선 그 땅과 정복해야 할 첫 성 여리고를 탐지하기 위해 정탐꾼들을 보냈습니다. 여리고 왕도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이 성에 들어왔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정탐꾼들이 머물던 곳은 기생 라합의 집이었습니다.
위기에 처한 정탐꾼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기생 라합은 정탐꾼들과 여리고 왕 사이에서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요? 인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행선지를 어디로 정하느냐에 따라 여행의 즐거움이 좌우됩니다. 인생도 순간순간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앞날이 결정됩니다.
이스라엘은 40년의 광야 행군에 이어 이제 목적지가 눈 앞에 보입니다. 여리고 성 정복의 성패는 앞으로 계속될 정복전쟁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정탐꾼들과 여리고 왕 사이에서 라합은 어느 편에 섰을까요?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향해 진군하던 당시 모세가 보낸 열두 명의 정탐꾼들은 믿음으로 그 땅을 차지할 것인지 포기해야 할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섰습니다. 열 명은 포기하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고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땅은 우리 것이다’ 했습니다. 이제 그 믿음으로 이스라엘을 지휘하여 전쟁을 치를 때가 되었습니다.
애굽을 떠나 광야를 거쳐 가나안에 도착하는 과정에서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거의 죽었습니다. 따라서 광야에서 출생하여 자라난 세대가 가나안 정복전쟁을 수행해야 합니다. 출애굽 1세대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하시는 큰 일을 직접 경험했지만 신앙의 뿌리가 약해 쉽게 흔들렸습니다. 그러나 출애굽 2세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자랐습니다. 새 옷을 입지 못했지만 그 옷이 헤어지거나 더러워지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가나안 땅을 차지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제 한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강적과의 전투에 나서야 합니다. 두려운 상황을 믿음으로 돌파해야 합니다. 정탐꾼들은 여호수아가 시키는 대로 양식을 준비하여 요단 강을 건넜습니다. 여리고 성에 들어가서 숨었지만 여리고 왕의 수색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라합의 입술에 목숨이 달렸습니다.
그러나 낙심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 없이 세상에 살다가 실패하여 하나님을 경험하면 신앙고백을 하고 성도의 거룩한 삶을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뿌리가 약해 쉽게 흔들리고 옛날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그러나 2세대 3세대로 신앙의 삶이 이어지면 뿌리를 깊이 내리고 영적인 키가 크고 튼튼하게 자랍니다. 가지를 내고 열매를 맺습니다. 실족했어도 하나님께서 다시 일으켜 주시고 대를 이어 신앙이 자라게 하십니다. 1세대의 실패는 2세대의 성공으로 이어지고 천대까지 은혜를 받습니다. 그 결과 정탐꾼들은 담대하게 여리고 성에 잠입했습니다.
믿음으로 여리고 성을 탐지하러 간 정탐꾼들은 자수하여 여리고 편에 설 것인지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할지 결정해야 했습니다. 기생 라합은 조국을 위해 여리고 왕의 편에 설 것인지 정탐꾼들의 하나님의 편에 설 것인지 결단해야 했습니다. 라합은 조국과 왕을 버리고 하나님 편에 섰습니다. 왕이 보낸 군인들에게 정탐꾼들이 이미 성문 밖으로 도망을 쳤으니 따라가 잡으라고 친절하게 코치까지 했습니다.
현재에 초점을 맞추느냐 장래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우리의 미래가 결정됩니다. 하나님 편에 섬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인지 잠시 후에 끝날 세상 편에 설 것인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느 편에 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5, 6) 하십니다.
누구나 하나님이 주신 탁월한 조건을 갖추고 세상에 왔습니다. 그리스 신화 속 영웅 헤라클레스는 쾌락과 덕망이라는 두 여인이 내미는 길 사이에서, 많은 수고와 고통이 따르지만 선한 삶으로 이끄는 덕망의 손을 잡았습니다. 반면 이스라엘의 장사 삼손은 여인과의 사랑을 위해 하나님을 저버렸고, 결국 원수들에게 눈을 잃고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편에 서서 영생을 얻고 복된 길을 가려면 죄의 유혹에 이끌리지 않는 불굴의 의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님 편에 서기로 결정한 라합은 정탐꾼들을 자신의 집 지붕 위로 올라가게 했습니다. 그리고 지붕 위에 있던 삼대더미 아래에 숨겼습니다. 여리고 왕에게 들키면 목숨이 위태롭고 자신의 생명과 가족까지도 화를 당할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동족들이 보기에는 조국을 배신하는 떳떳하지 못한 행동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라합은 일시적인 기분으로 정탐꾼을 숨겨주지 않았습니다. 그녀에게는 정당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수 2:9, 10) 라합은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넘겨주실 줄을 믿었습니다.
라합은 이스라엘과 그들의 하나님이 여리고 왕보다 더 위대하고 강하다고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여호와 하나님이 여리고 왕뿐 아니라 만왕의 왕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녀가 하나님 편에 선 결정적 이유입니다.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수 2:11)
세상에서는 약하고 여리고 성을 정복할 가능성이 전혀 없었지만 라합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고 정탐꾼들을 숨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라합은 정탐꾼들을 숨겨주는 조건으로 여리고가 멸망할 때에 자신과 가족들의 생명을 구해달라고 했습니다. 정탐꾼들은 라합에게 붉은 줄을 창에 달아매라고 했습니다. 약속대로 라합과 그의 가족들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라합처럼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 편에 선다면 앞길에 장애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갈릴리 가족 여러분! 이사야 55:9절입니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합니다. 길이 좋다고 좋은 결과가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길은 좁고 평탄하지 않을지라도 마침내 성공합니다.
정탐꾼들은 여리고에 들어가자마자 한 영혼을 구했고 그를 통해 여리고 정복전쟁은 승리의 첫걸음을 떼었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 편에 선 라합은 예수님의 족보에 올랐습니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마 1:5, 6) 순간의 선한 결정이 가져온 축복이 자신으로 끝나지 않고 먼 후손들을 통해 전 인류에게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인생길에는 구불구불한 산길도 있고 푸른 초장에 난 길도 있습니다. 되돌아가야 하는 경우도 있고 위험한 산길을 밤에 통과하기도 합니다. 진흙탕 길도 있고 잘 포장된 도로를 기막힌 경치를 즐기며 달리기도 합니다. 순간순간 그 모든 길에서 선택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길은 위태하고 성공할 가능성이 없어 보이지만 순종하고 나아가면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은 오늘 우리가 복음으로 세상을 정복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름으로 약속의 땅 가나안을 차지하는 길이 활짝 열리고, 하나님을 사랑하여 천대까지 은혜를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Dry Land in Jordan — 여호수아 3:7-17
창세 이래로 인류는 하나님을 거역한 죄로 영적 전쟁터에서 살아왔습니다. 선교사들은 영적전투의 최전선에서 싸웁니다. 중국내지(中國內地) 선교의 개척자 허드슨 테일러가 중국을 방문할 당시 그곳은 생존을 위한 전쟁터였습니다.
국내정세가 불안하여 물가가 폭등하고 질병이 만연했습니다. 굶주림에 사경을 헤매기도 하고 가족들이 죽어갔습니다. 외국인들은 학살당할 위기에 있었습니다. 복음으로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서는 투쟁해야 하고 모험이 필요합니다. 하루는 허드슨 테일러가 범선을 타고 선교지를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예상치 못했는데 식인종들의 섬이 나타났습니다. 방향을 바꾸려 했지만 바람이 불지 않았습니다. 선장이 기도를 부탁하자 테일러는 먼저 돛을 펴라 했습니다. 바람이 불지 않아 돛을 펴도 소용이 없다면서 선장이 거절했습니다. 테일러가 돛을 펴지 않으면 기도하지 않겠다고 하니 선장은 할 수 없이 돛을 폈습니다.
테일러가 계속 기도하는 중에 선장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습니다. “그만 기도하세요.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려는 이스라엘 앞에는 요단강물이 넘쳐흘렀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가나안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 후손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입니다(창 12:7). 하나님의 약속이었지만 75세도 넘은 노인이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믿기 어려웠습니다. 기다려도 아들을 낳지 못하니 아내의 여종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100세에 아들 이삭이 사라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절대로 변경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과 에서를 낳으면서 후손들이 번성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르지 않고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구원을 의심하고 불평했습니다. 홍해 앞에서, 광야에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나서도 이스라엘은 틈만 나면 모세를 대적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의심하며 불평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시며 만나와 메추라기로 이스라엘을 먹이시고 마침내 가나안 땅을 건너갈 수 있는 자리까지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은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요단 강만 건너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강물이 넘쳐서 건널 수가 없습니다. 홍해 앞에서처럼 전진할 수도 없고 후퇴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이 알게 하리라.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 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수 3:7, 8).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강에 이르면 흘러넘치는 강물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기적이 중요한 게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되시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언제까지나 믿고 의지할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영원토록 변하지 않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히 1:3)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행함으로 이스라엘에게 일어난 일들이 오늘 우리들에게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타고 건널 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전원 수영을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하셨습니다.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한 곳에 쌓여 서리라”(수 3:13).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각 지파에 한 사람씩 열두 명을 택했습니다. 이제 남은 일은 하나님을 믿고 요단강을 건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단강은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쳤고 이스라엘이 요단강 앞에 섰을 때가 바로 그 시기였습니다.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그 뒤를 따르라 했습니다. 백성들은 뒤따르고 제사장들은 앞서서 걸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이 강물을 갈라주시고 나서 건너가라 하신 게 아닙니다. 먼저 넘쳐흐르는 강물에 발을 내딛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발바닥이 닿자 넘쳐흐르던 강물이 멈추고 맨땅이 드러났습니다.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게 하셨던 하나님이 다시 요단강을 걸어서 건너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수고하고 힘쓰는 것으로 살지 않습니다. 여호수아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작전명령을 따랐습니다. 즉각 성공하기도 했지만 순간의 실수로 불리한 싸움을 싸우기도 하고 실패의 경험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정복전쟁을 마치고 미정복 지역이 남은 상태에서 그 땅을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게 분배했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의 약속이 현실로 나타남을 전제로 앞길을 걸어가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 합니다. 믿음의 행위로만 거룩한 백성의 복을 누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강 바닥에 닿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기를 마칠 때까지 모든 이스라엘은 그 마른 땅으로 건너갔더라”(수 3:16, 17).
홍해 바다 앞에서는 백성들이 두려워서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는 것이 광야에서 굶어 죽는 것보다 낫겠다고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태어난 세대들은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시며 어떻게 백성들을 인도하시는지를 보고 자란 젊은 세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여호수아의 지시에 불평하지 않고 순종했습니다. 순종이 기적을 낳았습니다.
여호수아 시대에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넌 사건은 광야 생활을 끝내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첫걸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시험과 환란을 당하면서 신앙의 훈련을 마치고 천국 시민으로 정착하는 단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 시대를 사는 우리도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넌 것처럼 첫걸음부터 결단과 모험을 요구합니다.
처음에는 신앙 경험도 없고 지식도 부족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자신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넘치는 강물에 발을 내딛은 것처럼 믿음의 발걸음을 떼면 반드시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영적 체험이 쌓여가면서 깊이 뿌리를 내린 나무처럼 성숙한 신앙으로 자라납니다. 그러므로 시편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를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 1:2, 3)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갈릴리 가족 여러분! 우리에게 넘치는 요단강물은 말씀을 실천하고자 하지만 겁이 나서 행동으로 옮길 엄두가 나지 않는 상황입니다. 처음 주일 성수를 하고자 하는 성도들은 많이 당황하고 신앙으로 살기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부장제도 하에서는 부모나 집안 어른들까지 압력을 가할 수 있습니다. 경조사나 명절과 제삿날이 주일이면 큰 시험으로 다가옵니다.
또 십일조 헌금을 드리고자 할 때도 너무나 두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십일조부터 바치고 나면 생계가 유지될 수 없기도 하고 가정불화로 고통을 겪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상황에 좌우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어려운 결단만큼 신앙도 자랍니다. 하나님을 충분히 경험한 성도들이 넘치는 강물을 멈추게 하고 마른 땅으로 걸어서 건널 수 있습니다.
말씀을 삶의 매뉴얼로 삼아 형통한 복을 받으려면 믿고 행하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외적인 행위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가짐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살고자 하는 성도들의 성공이 확실한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의 발걸음을 한 걸음씩 일일이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매일 매일 일마다 때마다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라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 넘치는 요단강물을 마른 땅이 되게 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이 예비하신 모든 복을 받아 누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srael was circumcised at Gilgal · 여호수아 5:1-12
요단강을 마른 땅으로 건넌 이스라엘 백성은 여리고 앞 길갈에 이르러 진을 쳤습니다. 요단 서편의 모든 아모리 족속의 왕들과 해변의 모든 가나안 족속의 왕들은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마르게 하신 것을 듣고 마음이 녹아내렸고, 이스라엘 자손 때문에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곧바로 여리고를 향해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길갈에 머물게 하시고, 먼저 그들에게 할례를 행하게 하셨습니다. 전쟁을 앞둔 백성에게 가장 먼저 필요했던 것은 무기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을 새롭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요단강 가운데서 취한 열두 돌을 길갈에 세워 기념비로 삼았습니다. 이는 자손들이 후에 "이 돌들은 무슨 뜻이니이까" 물을 때,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마르게 하신 일을 알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길갈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기억하는 자리였습니다. 광야 생활을 마치고 약속의 땅에 첫발을 내디딘 그곳에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여기까지 인도하신 분이 오직 여호와이심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겼습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한 백성 중 광야 길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할례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할례는 아브라함 때부터 하나님의 백성 됨을 나타내는 언약의 표징이었습니다.
할례는 몸에 행하는 표였지만, 그 참뜻은 마음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거듭 마음의 할례, 곧 목이 곧은 것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이키는 삶을 요구하셨습니다. 몸의 표만 있고 마음의 순종이 없다면 그 언약은 온전한 의미를 이루지 못합니다.
길갈에서의 할례는 단순한 의식의 반복이 아니라, 광야 세대가 끝나고 새로운 세대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다시 서는 사건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겉으로 드러나는 신앙의 표보다,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결단이 더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할례를 받은 후, 여호와께서는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하시며 그곳 이름을 길갈이라 부르게 하셨습니다. 길갈은 "굴러가다"라는 뜻으로, 애굽에서 종 되었던 지난날의 수치가 완전히 벗겨졌음을 선포하는 자리였습니다.
할례를 받은 백성은 낫기까지 진에 머물며 다시 힘을 얻어야 했습니다. 전쟁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는 것은 인간적으로는 큰 위험이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만을 온전히 의지하는 훈련이 되었습니다.
길갈은 이후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을 만나고 새롭게 결단하는 자리로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사무엘 시대에는 백성이 길갈에 모여 사울을 왕으로 세웠고, 후대의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이 길갈에서 받았던 첫 은혜와 언약을 되새기라고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길갈은 오히려 우상 숭배와 형식적인 종교 행위의 장소로 변질되기도 했습니다. 처음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지 못하고 겉모습만 남을 때, 은혜의 자리도 심판의 자리로 바뀔 수 있음을 성경은 경고합니다.
할례를 마친 이스라엘 백성은 그 달 십사일 저녁에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할례와 유월절은 함께 지켜져야 하는 언약의 예식으로, 할례 받지 않은 자는 유월절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몸에 새긴 언약의 표와,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은 은혜를 기념하는 절기가 이렇게 나란히 이루어졌습니다.
유월절 다음 날부터 백성은 비로소 가나안 땅의 소산,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습니다. 광야에서 그들을 먹이시던 만나가 그치고, 이제는 약속하신 땅의 열매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유월절은 애굽에서 죽음의 재앙이 이스라엘 집을 넘어갔던 그 밤을 기억하게 합니다. 문설주에 바른 어린양의 피를 보시고 여호와께서 그 집을 넘어가셨던 것처럼, 할례와 유월절을 통해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지켜지는 백성임을 거듭 확인했습니다.
가나안 땅의 강한 민족들 앞에서 갓 할례를 받아 스스로를 지킬 힘조차 없었던 이스라엘이 두려움 없이 설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의 힘이 아니라 그들을 세우신 여호와께서 함께하신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땅의 소산을 먹은 다음 날부터 만나가 그쳤고, 다시는 만나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습니다. 사십 년간 광야에서 매일 아침 채워주셨던 만나가 그친 것은, 이제 약속의 땅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그들을 먹이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공급의 방법은 바뀌었지만, 채우시는 분은 언제나 같은 여호와이셨습니다. 광야에서도 가나안에서도, 이스라엘의 하루하루를 붙드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후 이스라엘은 종종 광야에서 경험했던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가나안의 우상들을 좇았습니다. 훗날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했던 사건은, 눈에 보이는 풍요와 안정 앞에서 이스라엘의 믿음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길갈에서 애굽의 수치를 벗고 새롭게 출발했던 백성이 다시 우상 앞에 무릎 꿇는 모습은, 은혜를 받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마음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 줍니다.
길갈에서 할례를 받고 애굽의 수치를 벗어버린 이스라엘처럼, 오늘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몸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 곧 성령으로 말미암은 거듭남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합니다.
이스라엘이 길갈을 기억하며 살아야 했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를 구원하신 은혜의 자리를 기억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끄시는 손을 붙잡고 순종하며 걸어갈 때, 우리는 날마다 채우시고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다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Jericho's Victory · 여호수아 6:12-25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은 광야를 거쳐 마침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도착했습니다. 말로만 들어왔던 그 땅을 이제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 믿음으로 행하면 얼마든지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행동에 옮기는 일은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공격 목표인 여리고는 성문을 굳게 닫았고 병력과 물자 등 전쟁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춘 상태였습니다. 아무도 접근할 수 없도록 철저히 방어하며 지키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전쟁을 위해 무기나 식량 등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확신을 위해 할례를 받았고, 어린 양의 피로 구원받은 것을 기념하여 유월절을 지켰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수 6:2)라고 하시며 작전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불신앙으로 우상을 섬기는 여리고와 할례받은 이스라엘의 전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상대하는 싸움과 같았습니다. 누가 이기겠습니까?
여리고 왕과 그 성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일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에게 상대가 안 되는 미약한 자들이었지만, 하나님이 어떻게 나오실지 알 수 없어 두려워 떨며 혼이 나갈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할 수는 없었기에, 여리고 왕은 이스라엘의 동정을 살피며 철저히 방어 태세를 갖추었습니다. 성문을 굳게 잠그고 출입을 통제했고, 삼엄한 경비 덕에 라합의 집에 숨어든 이스라엘 정탐꾼들의 존재도 알아냈습니다.
성경에서 여리고는 고대 도시의 이름이지만, 오늘 우리에게는 불신앙의 옛 사람이 자리잡고 있는 우리 마음이며 하나님을 무시하거나 거부하고 인간 중심으로 사는 세상이기도 합니다. 여리고 사람들도 하나님 없이 잘 살아왔다고 여겼기에,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다 해도 이스라엘 편에 설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을 위해 일하시지 않았습니다. 여리고 사람들도 이미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을 충분히 보고 들었기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돌이켜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잘 살게 해 주셨고 죄를 범해도 일일이 심판하지 않으시며 오래 기다려 주셨습니다. 그러나 여리고 사람들은 하나님이 강하게 나오실수록 오히려 자신의 힘을 과시하며 누리던 삶에 안주하려 했습니다.
1868년 발굴이 시작된 이후 고고학자들이 100여 년에 걸쳐 탐색한 여리고 성은 외벽과 내벽, 두 겹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외벽은 5m 높이의 기초 성벽 위에 두께 2m, 높이 7m의 진흙 벽돌 벽을 세운,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이중 성벽이었습니다. 방어에 대한 자신감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힘을 믿었고 섬기던 신을 바꿀 마음은 없었습니다. 철저히 전쟁 준비를 마친 여리고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여호수아 6장 12~14절입니다.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니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궤를 메고, 제사장 일곱은 양각 나팔 일곱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계속 행진하며 나팔을 불고, 무장한 자들은 그 앞에 행진하며 후군은 여호와의 궤 뒤를 따르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진하니라. 그 둘째 날에도 그 성을 한 번 돌고 진영으로 돌아오니라. 엿새 동안을 이같이 행하니라."
이스라엘의 여리고 공격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매일 성을 한 바퀴씩 도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무장한 군사들이 선두에 섰고, 일곱 제사장이 나팔을 불며 그 뒤를 따랐고,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뒤이었으며, 후군이 행진을 호위하며 엿새 동안 이를 반복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작전이었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고 순종했습니다. 반면 여리고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두려워하면서도 정체를 알 수 없는 행렬에 불안하고 어이없었을 것이며, 그렇다고 함부로 나설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이 6일 동안이나 계속되었습니다. 여리고 사람들은 가만히 있다가 당해야 하는지, 말없이 성만 돌고 있는 적을 먼저 공격해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미 일곱째 날에 여리고 성이 무너질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날은 새벽부터 작전이 시작되었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성을 일곱 번 돌고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20절입니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그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점령하고." 모래성이라도 소리를 질러 무너뜨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사람이 측량할 수 없습니다. 여리고 전투는 이스라엘의 통쾌한 승리로 막을 내렸고,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작전을 믿고 따른 결과였습니다.
여리고 성 함락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 교훈은, 인간사가 사람 편에서 결정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입니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하나님의 죄인 구원을 TULIP이라는 다섯 가지 교리로 설명했습니다.
전적 타락(Total Depravity)은 완전히 부패하고 타락하여 구원의 소망이 전혀 없는 인간의 실존을 말하고,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은 구원받을 자를 하나님이 조건 없이 미리 선택하셨다는 뜻입니다.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들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며,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는 성령의 강력한 능력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는 반드시 구원받는다는 뜻이고,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은 그렇게 부르심을 받은 자의 구원이 반드시 완성됨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예수님이 허다한 기적을 행하시자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오랫동안 병을 앓던 한 여인도 예수님께 치료받고 싶었지만, 가까이 다가갈 수 없어 무리 틈을 비집고 들어가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댔습니다. 그러자 즉시 병이 나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막 5:3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여인은 오랜 세월 수많은 의사를 찾아다녔지만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더 심해지던 병을, 오직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감으로 즉시 치료받았습니다. 세상 모든 일이 다 예수님의 손에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나아가면 불가능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갈릴리 가족 여러분, 오늘날 우리 사회를 보면 삶의 무게에 짓눌려 스스로 생을 등지는 이들이 적지 않고, 저출산과 인구 감소로 인한 위기도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올랐습니다. 여리고 사람들처럼, 삶이 힘들고 소망이 보이지 않기는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오랜 옛일인 여리고의 승리를 공부하는 이유는, 그때 이스라엘을 위해 일하신 하나님께서 지금 이 순간에도 여러분과 저를 위해 일하고 계심을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우주와 그 안의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 인간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독생자를 보내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믿는 자들은 영생을 얻었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갑니다. 우리 모두 믿음으로 승리하여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삶을 온 세상에 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Defeat and Victory at the Battle of Ai · 여호수아 7:1 / 8:1-7
여리고는 이스라엘이 정복해야 하는 가나안의 첫 성이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간단하게 여리고를 정복한 이스라엘은 사기충천하여 두 번째 공격 대상인 아이 성 정복을 서둘렀습니다. 정탐꾼들은 여호수아에게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자고 했고, 백성 중 3천 명이 아이 성 공격에 나섰습니다. 여리고 같은 난공불락의 성도 간단히 정복했으니 아이 성쯤이야 했지만, 오히려 패전한 이스라엘 백성은 아이 사람들의 추격을 당해 도망했고 두려움으로 마음이 녹았습니다.
'아이'의 뜻은 '황폐한 작은 산'입니다. 여리고 서북쪽으로 18km, 벧엘 동쪽 2km 떨어진 작은 성으로 인구는 12,000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간단히 이길 것으로 기대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아이 성은 가나안 지경의 중심부를 관통하는 위치에 있어, 보기와는 달리 가나안 전체의 정복을 위해 전략상 매우 중요한 성이었습니다. 강한 자를 이겼다고 약한 자도 이긴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패전한 이스라엘을 어떻게 대하셨을까요?
여리고 성 전투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은 다시 아이 성을 공격하기로 했습니다. "백성을 다 올라가게 하지 말고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이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하지 마소서" 하므로 백성 중 삼천 명쯤 올라갔다가 아이 사람 앞에서 도망하니, 아이 사람이 그들을 삼십육 명쯤 쳐죽이고 성문 앞에서부터 스바림까지 쫓아가 내려가는 비탈에서 쳤으므로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 같이 되었습니다(수 7:3-5). 여호수아는 정탐꾼의 오판을 그대로 믿고 작전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스라엘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죽임을 당하는 병사들을 뒤로 하고 혼비백산 도망쳐야 했습니다.
패배의 원인은 정탐꾼들의 잘못된 판단과 그것을 굳게 믿은 여호수아의 잘못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편을 들어주실 수 없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람의 판단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경우에만 쓸모가 있습니다.
여호수아 7장 1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졌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 여호수아를 비롯하여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아간의 범죄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셨지만, 이스라엘이 묻지 않으므로 알려주실 수가 없었습니다.
한 번 성공하면 부지불식간에 하나님을 찾는 것을 잊어버리고 스스로 앞길을 결정하는 우를 범하기 쉽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자신들이 알아서 아이 성을 공격했습니다. 아이 성 전투의 실패로 이스라엘은 스스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한 사람의 행위가 공동체 전체에 어마어마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철저히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해 절망에 빠진 채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면 인간 편에서 힘을 모아도 소망이 없습니다. 여호수아는 참담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넘겨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 하나이까"(수 7:7-9). 참패의 쓴잔을 마셨지만 아직 희망이 있었습니다.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오면 해결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수아의 기도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범죄가 패배의 원인이라고 하시며, 구체적으로 그 죄의 내용을 알려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나의 언약을 어겼으며,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져가고 도둑질하며 속이고 그것을 그들의 물건들 가운데에 두었느니라...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수 7:11-12).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을 열두 지파대로 나오게 하여 제비를 뽑았고, 그 결과 아간의 범죄가 드러났습니다. 이스라엘은 아간과 그가 감추었던 모든 것을 아골 골짜기로 가져가 돌로 치고 불살라, 죄의 자리에 큰 돌 무더기를 쌓았습니다.
우리가 실패해도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승리의 새 길을 열어주십니다. 아간의 죄 문제를 해결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는 다시 아이 성 공격을 명령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내가 아이 왕과 그의 백성과 그의 성읍과 그의 땅을 다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수 8:1-2). 죄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의 작전을 따른 결과, 이스라엘은 아이 성에서도 크게 승리했습니다. 하나님이 주목하시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다는 겸손한 마음입니다. 교만한 마음을 물리치고 우리 죄를 짊어지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할 때만 성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세상 물결에 휩쓸리는 가련한 존재가 아닙니다. 어지러운 세상에 살지라도 우리에게는 축복의 대로가 활짝 열려 있으니, 그 길은 기록된 성경입니다. 성경만이 복된 길을 제시하며, 그 길을 따라 걸으면 인생의 험한 풍랑에도 안전합니다. 그 길은 율법으로 정리되었고 율법의 핵심은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의 요약은 하나님을 제일로 삼는 것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타인을 소중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지키는 삶의 결과는 매사에 하나님을 먼저 찾는 것과 주일성수로, 또한 부모 공경과 타인의 인격과 재물을 소중히 여기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율법을 잘 지켜 복을 받을 수 있는 힌트가 바로 십일조입니다. 온전한 십일조에 하늘 문을 열어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주시고(말 3:10), 지키지 않으면 그 반대로 저주가 임한다는 사실은 성경 전체가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약속임을 알게 합니다(말 3:9).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실패하는 원인은 우리가 지은 죄에 있습니다. 여리고 성에서 이겼으면 아이 성에서도 이겨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도 실패한 이유는 아간의 탐욕에 있었습니다. 탐욕 때문에 하와가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먹었고, 탐심은 모든 죄의 원인이 됩니다. 하와의 탐심은 아담을 파멸의 길로 이끌었고, 아담을 통해 우리 모두는 탐심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아무리 가져도 만족이 없고 결국 하나님의 자리까지 넘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계명을 지키려 힘을 다하지만, 결국 자기 생각대로 하다 실패합니다. 우리를 모든 죄에서 자유케 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 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삶이 어렵고 힘들어 포기하고 싶을수록 예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잘 지키면 하나님께서는 만 가지 은혜로 복된 삶을 살게 하시고, 연약하여 죄의 길로 가더라도 예수님이 흘리신 피로 우리를 깨끗하게 하셔서 복을 받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궁극적으로 실패가 없습니다. 전쟁터 같은 세상에서 우리가 모든 싸움에 이길 수 있도록 주신 작전 명령은 성경 66권입니다.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우리 모두 승리의 길만 걷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